일본에는 초등학생 때 한 번 가보고 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작년에는 대만을 여행했으니, 올해는 다른 여행지를 혼자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가깝고, 치안도 좋다는 일본에 3박 4일간 혼자 가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은 여성으로서 혼자 여행하기 별로 좋지 않다고 느꼈다.
남성이라면 애기가 다르겠지만, 나는 여성이니까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마찬가지로 섬나라인 대만과 비교하자면 대만이 훨씬 좋았다.
성불평등 순위 116위, 성차별 최악 국가
일본에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퍼펙트 블루>와 재밌게 읽은 소설 <편의점 인간>이 일본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만든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싶어졌다.
<퍼펙트 블루>(좌), <편의점 인간>(우)
그런데 내가 간과했던 게, <퍼펙트 블루>는 아이돌 산업을 다루다 보니 주인공 아이돌 '미마'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하는 모습이 나와도 그러겠거니 생각했다는 것이고 <편의점 인간>에서 편의점 알바생인 여성주인공이 겪는 폭력적인 언행이나 일본 사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과장이겠거니 생각했다는 것이다.
잠시 <편의점 인간>의 주옥같은 장면을 짚고 넘어가자. 편의점 알바생인 주인공이 결혼은 언제 하냐는 등의 주위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알게 된 남자와 계약 동거를 하기로 한 뒤 나누는 대화이다.
"오늘 하루, 여동생한테서 온 메일이 굉장했어요. 여동생이 나에 관한 일로 이렇게 신이 나서 까불고 떠드는 건 처음 봤어요."
"그야 그렇겠죠. 처녀인 채로 중고가 된 여자가 지긋한 나이에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남자와 동거라도 해주는 편의 훨씬 정상적이라고, 여동생도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p129>
여자력이라는 단어가 있는 나라
일본에는 전형적인 여성상이 있고, 여성들은 그 이미지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면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 사이에서도 배척당하는 분위기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지하철이나 TV 광고 등에서 들리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거진 획일화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받은 것도 일본이 추구하는 '조신한' 여성상을 되새겨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철에서 손흥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 한 번도 인위적인 느낌이 없는 남성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지하철을 많이 안 타봐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일본에서는 여성 목소리가 나레이션이든 광고든 훨씬 많이 들리는 느낌이고 그들이 얼마나 이 여성성을 추구하는 지 느낄 수 있었다.
개인주의 사회의 일면: 눈치보는 분위기
일본식 칸막이 식당과 서양인 반응
일본을 가게 된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이 개인주의 사회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여행을 할 때는 식문화를 고려하게 되는데, 칸막이 식당이나 혼밥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고 들어서 혼자 밥 먹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의 서양인 반응을 보면 알겠듯이, 일본의 개인주의는 서양의 개인주의와 다르게 눈치보는 것에서 파생된 문화이다. 혼자 밥 먹는 것을 이상하게 보다보니 칸막이로 아예 사람과의 접촉을 막아버렸던 것이다(한국도 혼밥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존재하긴 하지만 일본만큼 심한지는 의문이 든다).
사실 한국에서 칸막이 자리를 이용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혼밥 문화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일본에 가게 되어서야 획일화되고 눈치보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혼밥 문화가 생긴 것이지 일본이 주체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개인주의 사회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편의점 인간>, p102
심지어 식당 선택의 자유는 고독한 미식가 속 주인공처럼 백수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성인 남성에게만 용인되는 자유였다.
실제로 와닿은 차별
일본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11시 반 오픈하는 1인 모츠나베 식당에 찾아갔더니 불이 꺼져 있었고 사장님이 오후 5시에 오픈한다고 말해서 돌아서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배가 고파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던 한 식당으로 들어섰다(사실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가게 이름도 몰랐다).
혼자 밥 먹는 것에도 레벨이 있다. 하지만 내가 들어선 곳은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 꽤 있던 식당이었고 자리도 널널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식당에 들어섰는데, '어서오세요'라는 인사 소리도 들리지 않고 분위기가 꽤 싸했다.
나는 손님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인가 보다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마다 키오스크가 달려 있어서 주문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한국어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함을 느낀 건 가게 안 손님들의 성별과 다른 손님들을 대하는 점원의 태도였다. 혼자 식사하는 사람은 모두 남자였는데(이건 그럴 수 있다), 남자 손님들이 들어오고 나갈 때만 점원들이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외노자+일본인 점원들 하나같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서 차별한 걸까? 아닌 것 같다. 얼마 뒤 들어온 한국인 남자 손님들에게는 가증스럽게도 한국어로 인사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나는 자리안내/인사를 받지 못한 건 물론이고 계산을 할 때조차 귀찮다는 듯 뚱한 표정과 말투로 계산하는 불친절한 접객까지 받았다.
가게를 나오면서 의문이 들었다. 이전에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는 유후인과 캐널시티 하카타에서 식사할 때는 이렇게 불친절하지 않았는데 왜 여기서는 이런 대우를 받은 것일까?
그러다 커뮤니티 게시글 중에 <일본에서 혼밥하는 여성을 보는 시선>이라는 게시글을 보게 되었다.
남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국수를 먹는 반면에 아따맘마 엄마는 눈치를 보며 구석에서 먹는다
하필이면 내가 고른 식당이 규동을 파는 식당이었고, 그래서 알바생들이 불친절하게 대우했던 것이다.
참... 어이가 없고 씁쓸하기도 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은 차별이 덜한 듯한데, 일본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식당에 가면 외국인 여성이라도 바로 차별해버리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일본에서는 여자가 여자력이 떨어지는 메뉴를 혼자 먹는 걸 좋지 않게 본다. 일본의 여성 인권은 최하위 수준이며, 개인주의는 개뿔 남 눈치 엄청 본다.
일본을 떠나는 여자들, 남일같지 않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에서 여자로 살아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외국인인 내 입장이다, 잘 살아가고 있는 당신 입장이 아니다).
여자는 조신해야 하며, 요리를 좋아해야 하고, 몸매 관리를 해야 하며, 무뚝뚝하면 안 되고, 혼자 밥먹으면 이상하게 보며 국수 한 그릇 먹을 때도 눈치를 준다...
일본에서 해외 이민을 떠난 여자들의 수가 62%로 높은 것도 그런 제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게 남일같지는 않다. 한국도 성불평등 순위가 100권 밖으로 높은 나라가 아니고, 일본에서 먼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던 히키코모리, 노인 빈곤, 자살율, 낮은 출생률 등이 심각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일본 여행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가깝지만 먼 나라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아기자기한 감성과 좋은 공기, 깔끔한 거리, 울창한 자연환경, 맛있는 라멘 등 좋은 점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문화적 수준이 특히 젠더 쪽에서 수준 이하라는 게 느껴져 충격적이었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건 걱정스럽지만 설렌다. 내 마음대로 동선을 짤 수 있고 낯선 환경에 나 자신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여행지를 고를 때는 한 가지 기준이 추가될 것 같다. 그 나라의 성평등 수준이다.